자작나무/자작소설

범띠 미용사

나고목 2018. 3. 3. 15:11

 

봄비에 목련꽃이 망가지는 어느 비 내리는 날로 기억한다. 퇴근 후에 터부룩한 머리를 깎으려고 동네 미용실에 갔는데 비가 와서인지, 미용사 여자 혼자만 잡지를 넘기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고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뜻밖에 기다리질 않고 바로 머리를 깎을 수 있었기에 행운의 눈웃음을 지으며 거울 앞의 의자에 앉았다.

평소,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성격이라 다소곳이 머리 손질만을 보고 있는데 말주변 좋은 미용사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대화는 점점 재미를 더 했고 나는 전혀 어색함이 없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나이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는 범띠라는 동갑네를 만나게 되었다.

뜻밖에 같은 나이였을까, 아니면 손님이 없어서였을까, 그날 머리를 깎는 시간은 평소의 두 배를 지나갔지만, 동질성을 위한 범띠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시간은 영원히 우리를 그냥 놓아주지 않듯, 손님과 미용사의 위치로 되돌아간 우리는, 커다란 아쉬움을 남기며 그렇게 첫 만남은 끝이 났다.

그 이후, 몇 번을 그 미용실에 들려 머리를 깎곤 했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손님의 틈 속에서는 더 이상의 특혜 없이 맨송맨송 머리만 깎고 나오곤 했기에, 첫 만남의 여운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마지막으로 그 미용실을 찾았을 때는 겨울눈이 포근히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처음 미용실을 찾는 날처럼 손님이 아무도 없어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머리를 깎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세 확장으로 보조 미용사가 옆에 있어서 첫 만남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범띠 미용사는 나를 갑장이라며 반겨주었고,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무척 기뻤다.

눈 내리는 바깥 풍경처럼 미용실 내에 있는 목탄 난로의 따스함이 온몸으로 느낄 때쯤, 범띠 미용사의 가위질은 끝나고, 여느 날처럼 아쉬움을 뒤로하고 미용실을 나오려는데 범띠 미용사는 목탄 난로 위의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가리키며 함께 먹고 가란다.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녀의 말을 사양한 채 군고구마 하나를 달랑 들고는 잘 먹겠다

며 미용실을 나왔고 범띠 미용사는 멋쩍은 표정으로 눈으로 인사를 했다.

내 성격상, 함께 둘러앉아 군고구마를 먹을 용기가 없었지만, 말 많은 동네 미용실의 특성상, 행여 오해의 소지가 싫었다.

너무도 아쉬운 순간을 뒤로하고 눈 속을 걸어갈 때, 따스한 군고구마의 온기가 온 몸으로 빨려들었지만 겨울날씨는 마냥 춥기만 했다.

물론, 범띠 미용사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여자이기에 친구처럼 마음을 터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문화적 아쉬움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이사를 하므로 인해 다시는 그 미용실을 간 적도, 범띠 미용사를 본 적도 없다.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어린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이듬해 가을, 마누라가 살던 아파트에선 등굣길이 너무 위험하다며 이사를 간곡히 제의하는 바람에 현재 사는 아파트로 또 다시 이사를 왔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가 빠끔히 나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 여자는 현관 입구로 어깨를 스쳐 지나가고, 나는 엘리베이터 타고 우리 집으로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 여자가 우리 집 바로 위층에 사는 여자라는 사실을 마누라를 통해서 알았다. 물론, 그 여자가 옛날의 그 범띠 미용사라는 것도.

요즘도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그 여자와 만나 함께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눈인사만을 나눈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한다.

내가 그녀를 알듯, 범띠 미용사도 나가 예전의 단골손님인 갑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바로 위에 그 여자가 나란히 누워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사이버를 접한 지가 계절이 몇 바퀴 바뀌었다.

그동안 사이버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남들의 시선이야 어쨌든 간에, 앞으로 만날 것이다. 그런데 사이버에의 만남은 얼굴도 모른 채 느낌으로만 사귄 후에 만나서인지, 첫 만남 이라도 오래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하고 금방 친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사이버를 통해서 좋은 형님. 누님 그리고 동생들을 만났다. 가장 최근에는 같은 범띠들을 만났는데 쉽게 말을 트고 친구가 되니 정말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좋았다.

마치,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나서 사회생활을 하는 서양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봤다.

범띠 미용사를 사이버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어떤 사이일까? 라고,

처음 본지가 10년이 지나가니 아마 십년지기가 되었겠지.

그리곤 사이버 범띠 친구들을 사이버가 아닌, 생활 일부분으로 만난다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는 사이일까?

아마도 쉽게 이 사이버를 떠날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맛 때문이 아닐는지.

 

말 많고 사건 많은 사이버라지만, 일부의 범죄적 행위로 말미암아 전체가 매도되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오늘도 언젠가는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아 사이버를 누비면서, 이 나쁜 시선들을 중화하며 당당하게 오픈 마인드로 활동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지만 작은 봉사나 후원을 통해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를 기다릴 수밖에

 (20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