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자작소설

정승의 문상

나고목 2023. 5. 6. 06:44


                                          나고목

저승문에 서면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 아래
천길 낭떠러지로 푸른 물이 흐른다.
이 푸른 강을  구름  타듯 건너면
극락과 지옥으로 가는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혼령을 재판하는 시왕들 중에
첫 번째 왕인 진광왕부터
차례로
혼령을 기다리고 있다.

혼령이 도착하면
열 번의 관문을 통해
시왕들의 판결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고
저승사자의 착오로
잘못 데려온 혼령을
이승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오늘은
혼령이 많은 탓에
랜덤으로
다섯 번째 왕인
염라대왕과 그의 신하인 일직사자가
단독으로 재판을 진행하며
판결의 잣대도
'문상'에 관해서만 취조하는
약식 재판이 진행된다.

살아생전, 수많은 죄를
짓고 사는 인간이기에,
털끝 같은 죄라도 지으면
극락으로 갈 수 없다는
혼령들의 민원을  수렴한 결과이다.

고달수!
그는 평소
열일 제쳐두고
문상을 다녔기에,
오늘의 판결 잣대가
'문상'이라는
일직사자의 말에
쾌재를 부리며 좋아한다.

고달수의 머리채를
업경대로 잡아 비추며
일직사자가
염라대왕에게 고했다.

이놈은
살아생전
문상을 많이도 다녔습니다.

그러자,
고달수는 상기된 표정으로
장단을 맞췄다.

저는 남들보다
수 십 배 많은
문상을 다녔고
망자와 유족을 위해
삼일 밤낮을 꼬박 새워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고달수는
당당하게
극락으로 향하는
꽃길을 향했다.
그때,
염라대왕의 눈짓을 알아챈
일직사자가
그의 등줄기를
쇠꼬챙이로 찍어당기는 찰라,
염라대왕이 말했다.

너는 지옥으로 가는
저 불구덩이 길로 가거라.

깜짝 놀란 고달수는

제가 왜? 지옥으로 가야 하나요.
오늘의  잣대가 문상이면
다른 죄는 불문이지 않습니까?
비록, 마누라 몰래
바람은 피웠지만ㆍㆍㆍ

그래!
오늘
재판의 잣대가 문상이니
문상 외 다른 죄는 묻지 않는다.
네가 지옥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정승집 개에게만 문상하고
정작,  사람인 정승의 문상은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구나.

이 어찌
인간이 개만도 못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