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文殊山)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북쪽 능선으로 흐르면 태화강(太和江) 지류를 따라 현대자동차가 들어선 염포만(鹽浦灣)으로 흘러들고, 서남쪽 능선으로 흐르면 천성산(千聖山, 922m) 이 발원지인 회야강(回夜江)으로 흘러, 동해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간절곶이 보이는 진하해수욕장으로 흘러든다.
그런데 문수암(文殊庵)의 정 남쪽으로 내리는 비는 문수산이 발원지로, 망해사와 월드컵경기장인 문수구장을 돌아 율리 마을 앞의 두티지(豆峴池)에 모이고 이물은 다시 60 리를 흘러 처용암(處容岩)이 있는 개운포(開雲浦)로 흘러드는데 이 강이 바로 외황강(外隍江)이다.
장마철의 범람을 제외하곤 줄곧 작은 물줄기가 끊길 듯이 모래톱 사이를 이어가는 작은 강이지만 울산에서 발원하여 울산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이기에 울산의 유일한 강(江) 이 아닌가.
돌아돌아 흐르는 작은 강물이 바다를 지척에 둘 쯤, 일제강점기 때 만든 동해남부선 철교를 지나 삼각주에 다다르면 예전에 장터 마을이었고 면(面) 소재지였지만 사라호 태풍으로 몰락한 촌락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땅이다.
서향(西向)인 고향 기와집 마루에 앉아보면 집앞으로는 외항강이 흐르고 그 너머 멀리 남쪽으로부터 봉화산, 대운산, 꼬장산, 문수산이 병풍처럼 북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들이 임진년 왜구의 침입을 한양에 알렸다는 봉홧불 경로다. 아쉬운 것은 고향집 마루에서는 문수산 너머에 있는 치술령(致述嶺)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치술령이라면 다소 생소하겠지만, 신라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을 구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하곤 자신은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며 화형을 자초한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이 망부석이 되어 오늘날까지 동해를 바라보며 지아비를 기다린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산이라면 쉽게 기억날 것이다.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에 당도하니 하늘 구름의 조화로 앞의 분간이 어려워 이유를 알아보니 동해용이 진노함에 정성으로 재를 올리고 절을 지어 비니, 용과 일곱 아들이 나타나 유희를 즐겼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더듬어 보면, 당(唐) 희종에 의해 신라왕으로 책봉된 헌강왕이 이듬해 일어난 반란으로 많이도 상심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도 어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기에 왕권을 노리는 귀족들 간의 권력암투에 염증과 불안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다음 해에 황룡사에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베풀어 불경을 강하게 만들고 나라의 부흥을 이루려고 노력했다지만, 헌강왕 때부터 신라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기록을 보면 헌강왕이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질 못함에 신하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자연을 벗하며 유희를 즐기지나 않았을까, 내가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여간, 헌강왕이 신하를 데리고 개운포로 왔고 동해용의 일곱 아들 중에 한 아들을 데리고 경주로 돌아갔으며 동해용을 위해 망해사라는 절을 지었다. 는 기록을 토대로 과거를 조명해 보면, 처용암의 개운포는 현재의 보잘것없는 적막강산이 아니고 그 시절엔 군사 요충지뿐만 아니라 완도의 청해진처럼 무역의 요충지라는 짐작이 간다. 또한, 외황강도 지금은 모래로 덮인 작은 강이지만 옛날에는 상선이 드나들기 충분할 만큼 많은 물이 흐르는 강이었을 것이다.
어느 역사보고서에서, 현재의 망해사(望海寺)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용이란 인물과 망해사를 왕권강화를 위해 신격화시킨 허구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릴 적에, 외황강의 모래를 파면 바닷조개의 화석이 나오고 강기슭에 우물을 파면 물맛이 짠 것을 토대로,
역사 이전에, 지리학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00 년 전, 단순히 북극의 빙산이 녹아 해수면이 높았다면 현재의 개운포나 처용암도 바다에 수장되었기에 역사의 추론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세한 지축(地軸) 이나 지각(地殼)의 변화가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물을 반만 채운 대야의 중앙을 기준으로 한쪽을 올리거나 내리면 중앙의 물은 변하지 않지만, 물이 닿는 대야의 양쪽 면의 수위가 변한다. 이처럼 처용암이 대야의 중앙이고 외향강 상류가 대야의 끝 쪽이라면, 미세한 지축(地軸) 나 지각(地殼)의 변화에도 외황강의 물길은 상류까지 바닷물로 가득했을 것이다.
1200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문수산 아래의 망해사에서도 바다가 보였을 것이고 도도히 흐르는 외황강으로는 아라비아 상선들이 들락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강이었다.
서울 밝은 달에(東京明期月良)
밤 깊도록 놀고 다니다가(夜入伊遊行如可)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入良沙寢矣見昆)
다리가 넷이로구나(脚烏伊四是良羅)
둘은 내 것이었고(二隱吾下於叱古)
둘은 누구의 것인가(二隱誰支下焉古)
본디 내 것이지마는(本矣吾下是如馬於隱)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奪叱良乙何如爲理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
처용이 제 아내의 부정을 보고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고는 하나, 달 밝은 밤에 혼자서 겪는 상심함이야 어찌 말로 표현했겠는가, 벼슬이 무슨 소용이며 천하를 준들 사랑과 바꿀 수가 있었겠는가.
결국,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현새의 유행어처럼 사랑하기에 저주의 칼을 녹이고는 허한 미소를 머금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처용의 발자취도 모른 채, 해마다 12월이면 처용무로 그를 달래지만 처용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에, 차마, 아버지가 계신 곳은 가지 못하고 그가 찾은 곳은 외황강의 기슭일 것이다.
여기서 처용이란 인물을 단순한 전설 속의 용, 즉 허구라는 생각을 해서는 곤란하다. 용이란 황제를 뜻하는바, 동해의 용이라는 존재는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이며 이는 울산만을 배경으로 활발한 해상무역을 하는 호족을 지칭했을 것이니, 처용은 호족의 아들인 것이다.
헌강왕이 두려운 것은 역시나 반란이기에 호족의 아들인 처용을 볼모로 경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때, 호족의 반발을 우려하여 망해사를 짓고는 바다의 태평을 빌게 함으로써, 해상무역을 하는 호족에게 강경책과 함께, 회유책을 펼친 것이다.
처용의 전설 중에 전하지 않는 처용의 마지막 행적을 유추해보면, 더럽히진 아내지만 그가 떠난 후, 아내가 겪어야 할 고통을 알기에 외황강에서 칩거하는 처용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달 밝은 밤이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처용이 흘린 눈물은 외황강으로 스며들어 아버지인 동해용이 사는 처용암으로 흘러들고, 아들의 눈물을 본 동해용의 진노는 천하에 울리고 용을 위해 만든 망해사는 저주의 표적이 된다.
결국, 진노한 동해용이 자신의 눈알을 빼 망해사를 불바다로 만들고는 자신은 두 눈을 잃은 장님이 되어버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처용은 자신 때문에 장님이 된 아버지의 눈을 찾아 망해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절터는 새까만 잿더미 뿐임에 망연자실 한다.
처용의 통곡이 온 산에 가득하자, 문수산 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동해용의 눈은 망해사를 불바다로 만든 천벌로 외향강의 푸른 물속에 빠져버렸노라.'라고 전한다.
처용은 아버지의 눈을 찾으려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용의 힘을 빌려 외황강의 모든 물을 마셔버린다. 그러나 모래 속에 파묻힌 아버지의 눈을 찾을 길이 없자. 아버지의 눈을 찾아 동해로 돌아가려던 처용은 비통함에 피를 토하고는 외황강 기슭에서 생을 마감한다.
처용이 죽자, 외황강에도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다. 처용이 마셔버려 물길이 없어진 외황강은 하얀 모래만 가득한 죽음의 강으로 변하고 무역의 요충지인 개운포도 처용과 함께 슬픈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1200 년이 흐른 오늘,
망해사로부터 개운포의 처용암까지, 물길 60리 모래 속에 묻혀 1200년을 잠든 처용이 아버지인 동해용의 눈을 찾아 바다로 돌아가고 외황강에도 푸른 물로 가득한 옛 개운포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용의 승천!' 처용의 부활이 꿈틀거린다.
외항강으로 이어지는 울산 신항만 건설이 완공되고 내 마음 속의 강인 외황강이 되살아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망해사의 용마루로 그윽한 풍경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
처용이 부활하여 동해로 돌아가는 그날,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외황강으로 귀향하는 또다른 처나을 꿈꾸어 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