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자작소설

꼬장산

나고목 2014. 1. 5. 20:46

봄이 오는 꼬장산에는

분홍의 참꽃(진달래)이 장관이었다.

청춘 남녀는 분홍빛 참꽃이 만발한 산자락을 찾아

화전(花煎)을 부치는가 하면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웃음소리가

온 산에 가득했다.

참꽃이 지고 엷은 녹색이 점점 신록으로 물들면

어김없이 뻐꾸기가 찾아와 죽은 지 수십 년이 된 고사목(枯死木)에 앉아

구슬피 울기도 했다.

기암의 절벽 사이로 십 리 길 황솔 밭도 장관이었다.

봄바람이 지나고 높새바람이 불어오는 단옷날이 가까워오면

소나무를 스치는 솔바람 소리가 언제나 정겹고 불변(不變) 했다.

 

까투리가 퍼득이자,

엽총 소리가 안골까지 메아리를 치며 울려펴졌다.

도리모또 일행이 마을에 나타나고부터는

꼬장산에는 연일 엽총 소리가 요란하다.

도리모또는 긴 장총을 멘 포수 서너 명을 거닐고는

날마다 꼬장산을 누비며 곰 사냥에 나섰다.

그날도 곰 사냥에 지쳐 요깃거리로 까투리 사냥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는지,

엽총 소리가 난 한참 뒤에는 까투리를 굽는 노린내를 내며

황솔 밭 위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을 분위기도 점점 나빠졌다.

음흉한 눈빛의 쪽바리들이 객주(客酒)에 기거하면서

동네 아낙들이 낮에도 밖으로 잘 나다니질 못했다.

이렇게 동네의 인심이 점점 나빠지자 별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샘골에 사는 누구누구 여편네는 나물을 캐러 꼬장산에 갔다가

쪽발이 놈들에게 겁탈을 당했는데

남사스럽기는커녕, 그날부터 화냥기가 발정하여

낯짝(얼굴)에 분칠을 하고선 나물을 핑계로

서방질을 다닌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누구누구는 방년(芳年)의 딸년을 도리모또에게 노리개첩(妾)로 팔았는데

딸년을 판 막대금을 받으러 갔다가

도리모도 일행에게 개 맞듯이 맞아 병신이 되었다는 해괴망측한 소문으로

마을이 뒤숭숭하니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기장댁의 객주만은 달랐다.

빈 객주에 막걸리 사발을 팔아봐야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면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도리모또 일행이 기거하면서부터는

상황이 확실히 달라졌다.

도리모또 일행이 기거하면서부터 객주에 손님들이 늘어나니

기장댁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렸다.

날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도야지를 잡는다고 멱따는 소리가

캑캑했다.

읍내에서 데려온 기생 년들의 젓가락 장단에다가 장구춤 시위까지

잘나가는 여느 기생집은 아니라도 파리만 날리는

예전의 빈 객주는 아니었다.

 

그날 밤도 객주(客酒)의 청사초롱이

바람에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도리모또 일행이 안채에서 정종(正宗)으로 반주(飯酒)겸 저녁을 먹고는

곰 사냥에 지친 피로를 풀고 있었고

초롱불을 밝혀 훤한 마당에는 머슴 놈들의 윷판이 벌어져

객주 안의 마당이 온통 왈짜 지껄했다.

그런데 왁자지껄한 객주에 침묵이 흐르는 곳이 있었다.

기장댁이 붙이는 뒷골방의 노름판였다.

담뱃불로 찌진 누른 문종이 구멍으로 머슴들의 고래고래 고함소리가

스며들지만 꼴방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단지 무명천을 깐 노름판 위를 때리는 화투(花鬪)만 딱딱 소리를 낼 뿐였다.

초저녁부터 죽담엔 짚신이 가득했지만 문은 잘 열리지는 않았다.

간간이 칙간(厠間)을 오가는 낯선 그림자만 보일 뿐이다.

5일장이 열리고 파장(罷場)이 되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진풍경(珍風景)였다.

 

시커먼 심지의 희미한 호롱 불에서는

고래기름 타는 냄새가 진동하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냄새에 아랑곳없이 화투를 돌리는 염 씨(廉氏)는

자신이 딴 노릿돈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입담배를 거세게 빨았다.

메케한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자,

꼴방은 이내 너구리 소굴을 되었다.

왼쪽 뺨에 큰 사마귀가 난 볼품없는 염 씨지만 오늘은 기릿빨 때문인지

삐딱하게 입담배를 문 꼬락서니가 제법 부(富) 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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